Kyunghyang

참외와오키나와소년 우에즈노리아키씨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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쇼와 18년(1943년) 여름방학이었을겁니다.바닷가에서수영하다참­외를먹고있었습니다.여자애가먹고싶어하는­표정으로날바라봤습니­다.가즈오의여동생이었습­니다.물이풍부하고쌀농사를­지어자급자족이가능한­섬이었지만,태평양전쟁때문에다들­살기가힘들었습니다.나는참외를돌로쪼개여­자애에게나눠줬습니다.

1936년생인우에즈­씨의고향은구메지마(久米島).오키나와본섬에서서쪽­으로100㎞떨어진면적63.5㎢인섬이다.눈빛이정직하고입매가­우아한소년이눈부신태­양빛아래서참외를쪼개­던그 여름, 그섬엔조선인구중회씨­가족이살았다.그섬에이주해일용잡화­행상을하던구(具)씨의이름을그는다니가­와노보루로기억하고있­다.태평양전쟁이한창이던­당시오키나와

에는 군부와 위안부를비롯해조선인­들이살고있었다.가즈오는우에즈씨의동­급생으로구씨의장남이­었다. 가즈오에게는여동생이 둘 있었습니다. 아야코, 야에코.그리고남동생쓰기오,갓난아기.둘째여동생이가즈오껌­딱지여서우리가바닷가­에놀러가면항상따라왔­습니다.그에게는자신의고향섬­을철새처럼스쳐간 위안부들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다. 1944년 10 10공습 이전에도, 이후에도 위안부들이그섬으로실­려왔다. 70년이넘는세월이흘­렀지만그는누나들의얼­굴이선연하다. 조선삐라는경멸의단어­로누나들을부르는사람­들도있었지만나는그녀­들을 누나라고불렀습니다.한번은내가 누나 하고부르니까그녀들중­하나가달려오더니나를­끌어안고울기시작했습­니다.아마도그누나에게나만­한남동생이있지않았을­까싶습니다.

당시 오키나와에서 식민지출신조선인은 삼등국민, 일본군 노예, 잡부로 인식됐다.구씨의아내는오키나와­인인데,그녀의친정어머니는딸­이조선인과살고있다는­것때문에고향에서고개­를들지못하고다닐만큼­수치심을느꼈다.오키나와전이터지고본­섬에퍼진 스파이공포가구메지마­까지확산되기전까지,구씨가족에대한이웃들­의평판은호의적이었다.일본의무조건항복닷새­뒤인1945년8월2­0일밤.구씨가족은스파이혐의­로 일본군(구메지마에주둔하고있­던해군 통신대)에 의해 생후수개월의아기까지­무참히학살당한다.조선인이라는것과행상­을하며집들을돌아다닌­것이 스파이 혐의의원인이됐다. 가즈오가족이정말스파­이였다면수입(먹을게)이 있었겠지만, 정말 가난했습니다. 1944년 5월소풍을갔을때혼자­외떨어진곳에앉아있는­그애를봤습니다.지금생각해보면점심으­로 고구마나감자도 싸오지못해굶고있었던­게아닐까싶습니다.그만큼가난했기에스파­이는절대아니었을것이­라고생각합니다. 우에즈씨는일본군의총­검에찔려사망한친구를­생각하며안타까워서,미안해서운다.

내고향섬사람들은유이­마르의정신(ユイマ-ルの精神 품앗이 정신)으로 누구라도 따뜻하게 맞아주는 상냥한 이들입니다. 우에즈씨는오키나와인­인자신들이일으키지 않았지만속수무책으로 휘말려들어간 전쟁이그시절고향섬을,섬사람들을끔찍한괴물­로만들었다고생각한다.오키나와가미국통치하­에있던시기,그는24세되던해고향­섬을떠나본섬나하로진­출했다. 53년간미군아스팔트­롤러의오퍼레터, 택시드라이버, 노선버스기사, 학교급식원등다양한직­업에종사하다73세에­고향섬으로돌아왔다.아흔살을앞두고산신(오키나와전통악기)연주를제자에게가르치­며노년을보내는그의손­에는여전히쪼갠참외가­단내를풍기며들려있다. 오키나와 방언에 이차리바초데이(イチャリバチョデ- 出 えば皆な兄弟)라는 말이 있습니다. 만나면모두형제라는뜻­입니다.가즈오는그에게형제였­다. 오키나와방언에 치무(チム)라는 말도 있습니다. 마음으로알아채는것…마음깊이…그걸잃지않고살고싶습­니다.

가즈오를 만날 수 있다면 묻고 싶습니다. 가즈오, 여동생들은왜집에두고­도망쳤어?함께도망가면죽임을당­할까봐두고간거지?군인들이어린여자애들­은죽이지않을거라고생­각해서.

 ?? 소설가 ??
소설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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